JUNG TAE LEE
실재와 환각의 충돌
이정태 회화의 표면
이희영 (미술평론가, 인천대학교 겸임교수)
이정태는 1980년대에 미술교육을 받은 세대로서 최근 30년간 지속된 한국의 사회적 급변속에서 개인의 내밀한 반응에 집중한 몇몇 미술가들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제작은 통제와 억압에서 자유와 허용으로 변하는 환경과 다양한 실험의 폭증에 둘러싸였다. 그 속에서 그는 칠과 캔버스 사이의 관계를 자신의 매체로 삼아왔다. 미술이 삶을 대신하고 그것을 반영해야 한다는 1980년대의 당위론, 기술공학의 적극적 도입으로 매체를 새롭게 하거나 생태학적 논의에 유래하는 위기로 윤리의식을 요구하는 1990년대의 풍조, 그리고 전략적 이미지로 과장을 조장하는 2000년대의 시류, 이들 앞에 그의 이웃들은 어떻게든 반응해야 했고 그렇게 해왔다.
이번 북경(Beijing)에 걸리는 이정태의 회화들은 그가 본격적으로 전문 미술가로서 자신의 추진력을 세상에 펼친 10년간을 마무리하면서 제작된 "흐름과 리듬"연작(series, 2000~2006)과 최근에 새롭게 시도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연작(2007~) 중 선별된 몇몇 버전(version)들이다. 나는 외부의 다양한 변화와 요구 앞에서 회화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탐구로 지속된 이정태의 일관된 반응에 주목한다. 특히 관람자를 주목하게 하는 그의 섬세한 분별과 청명한 표면은 쑹주앙(宋莊)의 화랑공간을 새롭게 할 것으로 본다.
경험의 직접성
"흐름과 리듬"연작은 방문지의 장소와 목격한 대상을 뚜렷하게 재현하는 "길"(2000~2001), "대화"(2001~2003), 그리고 "숭산"(崇山, 2001~2003)버전을 포함한다. 이들 버전은 파열적 필촉과 대상의 사정을 일일이 쓰다듬는 듯 한 준법으로 캔버스에 옮긴 것들이다. "길"버전과 2003년 이전에 제작된 일부의 "대화"버전에서 늦가을의 지형지물과 물결은 유성 매제가 절제된, 뻣뻣하고 파열적인 붓질로 드러난다. 이 때 붓질은 고된 만큼 캔버스로 향한 미술가의 분투를 강하게 전해 준다. 2003년에 제작된 "대화"버전과 "숭산"버전에서 그의 화면은 거의 단색조로 바뀐다. 이 버전들에서 바위에 부딪는 물결과 산세를 암시하는 붓질은 유성 용제의 넉넉한 허용으로 훨씬 부드럽고 활달하게 미끄러진다. 물 위에 돋은 돌과 암산, 그리고 수목의 어두움은 매제의 적용을 절약한 채 화면 군데군데 어두움으로 뭉쳐있다.
파열적 붓자국이 수묵화의 준법에 비교된다면 이 어두움의 색면들은 농묵에 비교된다. 유채가 지닌 점성의 정도를 매제로 통제함으로써 이 버전들은 준법과 발묵이 적용된 수묵화의 표면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유성의 매제와 튜브에서 금방 짜낸 물감간의 차이는 이후 전개되는 "흐름과 리듬"연작에서 화면을 결정하는 중요한 회화적 장치로 활용된다. 건성의 뻣뻣한 필촉(혹은 색면)과 점성의 유연한 필촉(혹은 색면)의 충돌과 마찰에서 생기는 미끄러움은 그 표면을 투명하게 한다. 이는 바로 유화의 재료적 속성이 제작자의 재빠른 손길에 따라 그대로 드러내기에 가능하다.
그것은 렘브란트의 화면에서 노파의 주름진 이마에 내리 꽂힌 빛에 반응하는 피부에 적용된 유화의 속성과 같다. 캔버스의 표면에서 유채가 미끄러지면서 바탕의 색과 반응하는 이러한 크리미니스(creaminess)는 러시아의 레핀 미술학교(Repin Academy of Fine Arts)에서 돌아온 취앤산스(全山石)가 이전의 중국 현대 화가들과 구별되게 하는 것을 중국인들은 기억할 것이다. 취앤(全)의 크리미니스가 형태의 극명한 대비와 장엄한 규모를 위한 것이고 또한 이것은 오늘날 중국의 당대 화가들이 충분히 계승해 오고 있다.
이정태의 크리미니스는 미술가의 몸짓을 기록하고 극동의 전통을 유화에 복구하기 위한 장치이다. 물론 이정태의 화면 내부에는 중국의 화가와 같은 장엄함이 없다. 대신 그의 장엄함은 회화의 가장자리 경계와 그 이웃한 화랑 공간의 벽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는 그의 매체가 사각형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관람자가 서 있는 실재하는 공간과 동일한 영역에 포함되는 벽마저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의 화면은 내부의 사정으로만 판독되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의 전체 형태와 흰 벽면의 현실이 맞닥뜨린 충돌에 더 많은 관련을 갖는다.
이정태의 크리미니스는 경험된 대상의 표현에만 전적으로 소용되지 않고 오히려 제작하는 공정(경험하는 과정) 그 자체마저 포함한다. 그러니까 그의 회화는 경험된 장면에 관한 표현만이 아니라 제작자의 몸짓이 표면을 향해 돌진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캔버스의 탄력간의 생생한 충돌의 과정을 기록하는 셈이다. 이를 통해 미술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매체를 통해 논증하고 그 앞을 서성이는 관람자에게 실재하는 현실을 각성시킨다. 그의 표면은 시각적 자극이 유발하는 연상으로 완성되기보다 오히려 그 연상의 허구를 각성케 하는 조건을 갖는다.
각성의 기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연작의 제목은 이정태가 남미 여행 중에 들린 어느 공원에서 본 성인의 동상 앞에서 착안한 것이라 한다. 이 연작은 크게 2007년에 제작된 같은 제목의 "1"버전과 금년에 제작된 "2"버전으로 구성된다. 이전의 연작 "흐름과 리듬"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던 필촉들과는 달리 이 새 연작에서 칠은 상당히 절제되고 이미지의 재현에 기여하도록 통제된다. 새로 제작된 최근의 연작은 이전의 것과 연관될 분명한 암시가 얼핏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자주 등장하는 말과 사람들, 그리고 풍경과 골동품의 친절한 묘사는 미술가의 몸짓에 의존한 칠의 직접성을 포기한 것으로 보일 법하다. 회화 표면의 생기를 밝혀온 지금까지의 추구가 이제 그 표면의 물리적 진실에는 아랑곳않고 그 너머의 환각을 향하는 것으로 비칠 법하다.
이러한 변화에 불구하고 최근의 버전은 여전히 생생한 경험의 직접성이 포기되지 않는 점에서 이전과 일관성을 갖는다. 더욱이 회화를 대면하는 관람자가 점유하는 현실과 회화에 묘사된 이미지의 사실 간의 극명한 충돌을 통해 그 직접성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재현된 이미지의 사실적 묘사의 채용과 함께 연관성이 결여된 대상들의 천연덕스런 결합은 이전의 연작을 구별되게 하는 외관일 뿐이다. "1"버전은 마치 "흐름과 리듬"연작의 초기에 해당하는 "길"버전, "대화"버전에서처럼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반면 "2"버전은 그것을 토대로 미술가의 자리로 되돌아와 전개된 사념과 사색의 깊이를 더 많이 암시한다. 이것은 "숭산"버전 이후로 제작된 "흐름과 리듬"연작이 갖는 특성과 유사하다. "흐름과 리듬"역작 말기에 해당하는 2006년에 제작된 꽃의 형상이 있는 표면에서 바탕과 여백의 적극적 노출을 추가함으로써 유화에 의한 극동의 전통 복구라는 이정태의 실험이 완수되는 듯하다.
이제 이정태는 세세한 형상의 재현을 자신의 연작에 추가함으로써 서양 현대회화의 굳건한 믿음에 도전하거나 새롭게 하려는 시도를 한다. 특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연작 중 제 "2"버전에서 말을 탄 기수의 형상에 대비되는 배경의 바탕은 이전의 연작에서 추구된 제작자의 몸짓을 기록하는 칠이다. 캔버스의 물리적 사정을 밝히는 몸짓의 기록은 전적으로 추상을 향한 유럽 현대미술의 진화를 요약한다. 여기서 이정태가 적용하는 구상적 이미지는 바로 그 전개를 역행함으로써 서양미술의 전통을 재고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추상적 칠의 물리적 속성과 구상적 형상의 연상 작용, 이들 간의 충돌은 한꺼번에 그 앞에 선 관람자에게 제시된다.
제 "2"버전에서 캔버스의 바탕은 천의 조직과 미술가의 몸짓을 그대로 드러내는 칠이나 얼룩이라는 재료의 물리적 속성임과 동시에 구상적으로 친절히 재현된 말 탄 기수를 부각하는 배경으로도 판독된다. 그런가 하면 이 버전을 구성하는 다른 몇몇 작품들에서는 재료의 진실이 노출되는 표면에 그 막의 사정들을 찢어지고 뚫린 엷은 상태로 일일이 재현함으로써 재료의 진실과 판독되는 환각 간의 대비를 더욱 극명하게 제시한다. 이 때 관람자는 일말의 혼란과 충돌을 자신의 마음으로 통합할 기회를 갖는다.
무관한 대상들이 한 화면에 재현되고 그것이 서로 서술적 통합으로 비치는 점에서 이정태의 최근 회화들을 초현실주의 류(類)로 보일 법하다. 하지만 서술적 환각과 물리적 실체 간의 극명한 대비를 노출시키는 점에서 그의 버전을 전적으로 서사에 의존한 초현실주의로만 볼 수 없다. 실재하는 대상으로서의 직설적 판독과 관람자의 마음으로 읽혀지는 환각으로서의 이미지, 이 둘을 한꺼번에 제시하는 점에서 그의 회화는 그것을 진지하게 목격하는 관람자가 스스로 자신을 의식하게 하는 기회가 되려 한다.
이정태는 1920년대에서 30년대 사이에 이미 유화의 크리미니스를 실현한 한국현대 회화의 전통과 선배를 갖고 있고, 회화가 현실을 개조하거나 현실의 소통을 대신 할 수 있다는 신념과 회화형식의 순수한 실험을 통해 자유를 실천할 것이라는 형식론의 믿음 간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후 그는 대상에 대한 생생한 재현과 미술가의 몸짓을 결합하는 지점에서 본격적인 전문미술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회화의 물리적 진실을 판독하는 관람자의 직설적 경험과 그 표면의 이미지와 배경이 자극하는 연상적 경험을 동시에 제시하는 시도를 통해 회화의 매체적 가능성을 주장한다.
쑹주앙(宋莊)의 화랑에 전시되는 최근의 연작들에서 그의 시도는 회화가 제작과 관람의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체험되는, 바로 그 사실에 기여하는 매체임을 논증한다. 이를 위해는 그는 칠과 캔버스간의 마찰을 활용한다. 그런가하면 그는 표면이 물질로 막혀 있는 회화의 숙명과 그 표면이 뻥 뚫린 환각 사이의 상반된 판독을 통해 관람자를 창출한다. 칠의 실험과 관람자 창출의 과제는 현대 회화의 양보할 수 없는 매체적 과제일 것이다. 그와 같은 과제를 수행하는 그의 화면은 청명하고 담백한 표면과 과장되지 않는 규모로 해맑은 명상을 관람자에게 제공한다. 이 점이 그와 이웃하는 동시대의 중국 화가와 구별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