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G TAE LEE
이정태의 산수풍경, 眞景 또는 意境의 세계
김찬동(미술비평,전 아르코미술관장)
이정태는 풍경화가다. 풍경을 위주로 작업하는 화가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풍경화라면 사실적 기법이나 인상파풍의 그것을 떠올리겠지만, 그의 풍경화는 동양의 산수화와 접맥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동양의 산수화 역시 고리타분한 관념적 예술로 치부되는 경향을 감안한다면, 그의 작업은 당대의 첨예한 현대미술과는 거리를 가진 고전적인 작업으로 판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풍경화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동양의 산수화의 정신을 서양화에 접목하여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93년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그의 초기 작품들은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데이비드 살르(David Salle)나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류의 포스트모던 내지는 신표현주의적 경향의 작업이었다. 나무와 풍경을 소재로 추상과 구상이 병치된 중층 구조를 가진 거친 필치의 회화작업작품들로 동년배 작가들과 같이 시류에 편승한 양식의 작업이었다. 하지만 2002년 이후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풍경화로 방향을 선회하여 줄곧 산수와 풍경을 탐구하고 있다. 초기의 작품들은 산과 들을 다루는 일반적인 풍경화였지만, 점차 산이나 강, 바다 등 풍경의 특정한 소재들로 관심이 옮겨가며 소재들에 대한 탐구가 심화되어가는 양상을 보인다. 화가들에게 특정한 소재에 대한 지속적 탐구란 단순한 테크닉의 훈련보다는 대상의 본질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탐구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밑거름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폴 세잔(Paul Cezanne)의 정물이나 생 빅토와르 산 연작은 현대회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다. 그의 탐구는 사실주의 작가들의 재현이나 인상파 작가들의 망막을 자극하는 빛과 색 자체를 연구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산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 요소로서의 입방체와 다시점(多視点)에 대한 탐구였다. 이를 바탕으로 현대 추상회화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는 ‘현대 회화의 아버지’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서양의 풍경화는 일반적으로 외광의 풍경을 대상으로 하여 투시원근법에 의해 그 형상을 사실대로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에 반해 동양의 산수화는 피상적 풍경의 묘사나 재현보다는 풍경 속에 내재된 자연이나 우주의 본질 또는 자연을 접하는 인간의 정신을 탐구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정태의 풍경은 서구의 풍경보다는 동양적 산수 에 몰두한다. 산수에 대한 그의 새로운 관심과 접근방식은 2002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같은 해 개최된 ‘길,구름,물거품’전에서는 붉은 대지와 나무, 흙더미, 잡초, 구름 그리고 바위에 부딪쳐 흩어지는 포말 등을 거친 필치로 표현한다. 답사를 통해 경험한 실경을 다루며 ‘대화’라는 작품들의 명제에서 보듯 인생의 여정 속에서 문득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산하와 자연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얻은 것이라고나 할까? 이어 이듬해 발표된 ‘흐름과 리듬’전의 작품들은 <숭산崇山> 연작과 <대화> 연작으로 포말 자체를 다루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단색조의 산수풍경 속에는 산이 드러내는 강인함과 물이 드러내는 유연함이 교차한다. 이 시기 그의 산수에 대한 탐구는 구체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촉발된 듯하다. 겸재 정선의 대표작인 <인왕제색도仁王諸色圖>와 <금강전도金剛全圖>에서 보여주는 준법(皴法)과 음양(陰陽)사상은 그의 작업에 매우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진경산수의 준법이나 서양의 그것과 다른 투시원근법, 그리고 먹과 같은 매체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된다.
조선후기의 ‘진경산수(眞景山水)’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성리학의 학문적 성취에서 비롯된 자신감의 발로였다. 여말에 송(宋)으로부터 유입된 주자학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조선초기의 정착과정을 거쳐 퇴계 이황(退溪 李滉)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조선의 사유로 체화한 조선성리학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성취는 사회전반에 조선만의 독자적인 시각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름의 자부심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진경산수뿐만 아니라 우리의 저잣거리의 이야기를 다루는 여항문학(閭巷文學)과 우리의 우주관과 철학을 바탕으로 한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가 창안되어 조선만의 독자적 학문과 예술이 꽃피게 된다. 이러한 자부심은 명청교체기(明淸交替期) 명의 쇠퇴를 대신하여 조선이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기까지 한다. 조선이 주자의 성리학을 기조로 한 중화의 전통을 잇겠다는 자부심이다. 이렇듯 조선 후기의 성리학은 학문과 예술 전 영역에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발아시키는 이른바 조선 르네상스기의 요체이기도 하다. 진경산수는 이 시기의 대표적 문화운동으로 이 시기를 ‘진경시대(眞景時代)’라 일컫기도 한다. 진경산수란 조선 초기 곽희(郭熙) 풍의 중국산수를 모방하던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조선의 산수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진경산수란 산수를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 땅을 우리의 철학과 우리의 시각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사실을 묘사하기 보다는 우리의 산수를 조선의 성리학이 성취한 철학을 바탕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는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조선성리학의 성취는 음양을 기조로 한 이(理)와 기(氣)의 상관성으로 우주와 세계,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한 것이다. 퇴계의 철학을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라 한다면 율곡의 철학은 ‘이기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一元論)’이라 할 수 있다. 퇴계의 철학을 이어 받지만 이(理)보다는 기(氣)에 대해 중점을 두는 사유이다. 세계와 우주의 원리가 되는 이(理)와 이를 구현하는 실질적 에너지인 기(氣)로 나누어지되 양자가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상호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理氣之妙)으로 이와 기가 서로 이질적인 것이 아니며, 기가 양자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이론이다. 율곡은 현상적으로 만물의 근본은 기(氣)라 하여 기(氣)의 활동성과 능동성을 강조하였다.
이정태의 작품에서 보이는 2003년 인왕산 연작 <숭산(崇山)>이나 바닷물의 연작인 <대화>는 진경산수의 준법들을 서양화의 어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로 보인다. 그의 <숭산> 연작에서 보이는 겸재의 수직준법(垂直皴法)과 점준법(点皴法), <대화>에서 보이는 운두준법(雲頭皴法)의 탐구가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산세의 기운이나 파도의 생동에서 보이는 속성을 체득하게 된다. 강한 필치의 산세와 파도의 에너지를 탐구하기도 하고, 또 산수에 내재된 부드러운 흐름과 리듬의 끝없이 생성소멸하는 음양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이후 좀 더 자유로움을 얻으면서 변화를 꾀하는데 산과 물의 풍경 속에 내재된 전신(傳神)의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고 있다. ‘전신(傳神)’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국 동진(東晋)의 고개지(顧愷之)가 주창한 대표적인 동양미학의 개념으로 ‘형상을 통해 그 속에 내재된 정신을 구현하는(以形寫神)’ 것이다. 물론 전신은 초기에는 인물화의 가장 중요한 비평기준이었으나 점차 인물화뿐만 아니라 회화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송(宋)대 문인화론에서는 형(形)보다 신(神)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형을 잊고 뜻을 얻는(重神寫論)’ 작품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갈색 톤의 단순하면서도 반복적 리듬의 속성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형태 속에 내재된 본질적 측면에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2005-6년 그는 전업 작가로서 새롭게 출발하는데 이때부터 그의 작업은 좀 더 산수의 본질적 탐구와 필치의 자유로움을 획득한다. 실경의 풍경을 다루지만 형상보다는 자연의 본질인 음양의 흐름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변모하며, 특히 이 시기에 색에 대한 문제에도 관심을 보인다. 산수를 백색과 코발트의 단색조로 표현한다. 아무것도 아닌듯하지만 무한함을 담고 있는 백색, 우주의 근본색인 코발트색이 화면의 주조를 이룬다. 그는 매우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백색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접근한다. 무한한 가능태로서 존재의 시작과 끝으로 인식한 그의 사유 속에 음양(陰陽)과 이기(理氣)를 근간으로 하는 생성소멸의 동양적 사유가 그의 작품에 구체적으로 개입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이전의 작업보다는 좀 더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 백(白)으로부터 백(百)
백자(白磁)의 백(白), 여백(餘白)의 백(白), 흰옷의 백(白)은 무(無)이다
무(無)는 유(有)를 낳으니 백(白)으로부터 백(百)은 가능태(可能態)다
무(無)는 존재이전(存在以前)에 있다
백(白)은 시작(始作)이며 완성(完成)이다
백(白)은 색(色)이 아니라 그 자체(自體)로 있다.“ (2006.작가노트)
준법과 함께 색을 통한 형의 탐구의 세계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산수는 이미 피상적으로 보이는 산수라기보다는 산수가 가진 실체와 본질을 궁구하는 차원에서 자유로움을 얻고 있다고 보인다. 그의 작품에는 실경이 가지는 형태와 요소의 자유로운 변형, 그리고 유사형태의 반복이 나타난다. 겸재가 보여주었던 진경산수 역시 실제풍경의 사실적 재현이 아니고 음양의 사유에 따른 실재 산수의 변형과 이상적인 요소들이 첨삭되는 특성이 있다. 그 역시 자유로운 필치의 반복적인 형태와 리듬만으로 산과 물을 드러내기도 하고 이러한 리듬이 집적된 화면을 입체의 구조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 당시 <대화>연작으로 발표된 3차원 입방체로 표현된 물의 흐름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강물이나 바다를 하나의 에너지의 물질적 덩어리로 해석해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음양(陰陽)과 함께 물감과 행위가 가지는 물질적 속성인 기(氣)의 세계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도는 또한 색을 통한 형의 탐구의 영역으로도 옮겨간다. 흰색과 코발트색의 리듬 자체인 그의 회화작업은 청화백자에서 맛보는 고졸함과 함께 경쾌함을 가진다. 그는 지속적으로 코발트색이 가지는 매력에 빠져들어 산수자체가 코발트 톤으로 변모한다. 코발트 청색은 작가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색채임에 틀림없다. 이브 클랭(Yves Klein)이나 이우환이 보여주는 블루는 우주적 또는 영혼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 역시 코발트 톤의 산수를 통해 우주와 영혼의 문제를 질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그의 작업은 산수의 요소들을 필치의 변화를 통한 흐름과 리듬의 속성을 강조하는 화면과 병행하여 조심스럽게 좀 더 사실적인 풍경으로 옮겨가고 있다. 물론 이 풍경은 코발트 톤을 기조로 한다. 전체적으로는 운무에 둘러싸인 산수풍경을 드러내지만 산의 정상부분에는 밝은 빛이 집중되어 있고, 계곡의 물이 흘러들어오는 상류부분의 원경이 밝은 빛으로 처리되는 형태의 풍경이 등장한다. 지극히 높은 숭산이 신비한 서광을 받고 있는 색다른 풍경이다. 이것은 산수가 실경인지 여부의 문제보다는 산수를 통해 자연과 우주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가하는 태도이며, 또 동시에 자연을 접하는 작가의 심경이기도 하다. 자연대상과 심경이 하나가 되는 자유함이라고나 할까? 지극히 높고 영원성을 향한 정신적 동경이라 할까? 동양의 미학에서 말하는 의경(意境)에 대한 탐구라고 할까? 의경(意境)은 외부의 물상(物像)들과 내부의 심경(心境)의 만남을 의미한다. 마음과 물상(物像)간의 관계는 경(境)이라는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공간으로 고양된다. 경(境)은 ‘경계나 구역을 가리키는 단순한 의미에서부터 조예(造詣), 즉 예술가의 예술수양이 도달한 정도나 수준 및 문예작품에서의 상황이나 범위’ 등을 뜻한다, 바깥 사물을 마음으로 읽어내는 경지를 의미한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산의 정상 부분의 하늘엔 옅은 오렌지색 띠를 그리고 있는데, 그는 이것을 우주에 드리워진 지구의 그림자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그의 이러한 작업들은 진경에서 출발하여 현실을 넘어선 풍경과도 같이 지극히 높은 정신세계인 산수의 이상을 탐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상은 인간의 신념일 수도 있고 절대자의 창조의 섭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조심스런 시도는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여지가 있다.
근작들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의 성격은 그간 작가가 추구해온 산수의 방향성과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시류에 편승한 포스트모던적 경향의 작업을 포기하고 정통적인 사실적 풍경화로 전환한 이후 겸재의 진경산수적 시각을 접맥시킨 2000년대 중반의 작업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번 전시의 맥락과 의미를 조명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번 전시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그가 새로운 산수풍경의 지경을 넓히기 위한 모색의 전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산수풍경은 그 자체보다도 산수의 본질을 탐구하는 일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준법과 색채를 탐구하며 산수풍경을 통해 이(理)와 기(氣)의 상관관계를 모색하고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의경(意境)의 경지를 향해 가는 그의 족적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의 산수풍경은 눈에 보이는 단순한 산수의 차원을 넘어 물상과 심경이 하나가 되는 지경을 모색하는 지난한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