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G TAE LEE
유동하는 시간, 개화하는 공간
이정태 개인전에 부쳐
김찬동 (전시기획,미술평론)
작가 이정태는 초기 뉴페인팅 형식의 풍경으로부터 무한 공간을 추구하는 현재의 풍경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풍경을 다루어 오고 있다. 그는 풍경화가라기 보다는 풍경을 소재로 변화하는 사물과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가라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서양미술에 있어 풍경화는 근대 이전까지는 작품의 배경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근대 이후 독립적인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풍경은 특히 외광을 다루던 인상파 작가들에게 주된 탐구 대상이 되었는데, 시시각각으로 변모해가는 광선과 색의 변화에 따른 망막의 자극을 신속하게 포착하는 일에 몰두하였던 그들에게 풍경은 가장 매력적인 소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양미술에 있어 풍경화는 르네상스 시대 발명한 투시 원근법에 기반한 자연 대상의 객관적 구현을 지향하였다. 하지만 동양미술에 있어 산수화는 자연을 사유하는 상징적 태도로서 우주와 인간의 상관성을 관념적으로 추상화한다는 차이를 보인다. 동양의 산수화는 자연과 인간,우주를 포함한 철학과 사유를 내포하고 있다. 산수화의 경우에도 삼원법(三遠法)이라는 독자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서양의 과학적인 투시 원근법과는 달리 다원적 시점의 이동에 의해 구도상의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변화와 함께 독특한 공간미를 제시한다. 또한 산수를 표현하는 다양한 준법 역시 자연의 외관에 대한 사실적 묘사의 방법이라기보다는 자연의 본질인 전신(傳神)의 표현이거나 자연에 대한 사의(寫意)적 기표일 뿐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서양의 풍경화나 동양의 산수화는 양태는 유사하지만 자연 대상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과 세계관의 본질적 차이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정태의 풍경은 피상적으로는 서양의 풍경화처럼 보인다. 유화나 아크릴로 캔버스 위에 그려진 그의 작품에는 산과 강, 바위와 나무, 하늘과 바다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의 풍경은 동양의 산수화적 성격이 강하다. 자연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지만 특정한 색조와 형식으로 산수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그의 풍경엔 투시원근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시점으로 자연대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초기 사실적 풍경을 다루면서 재현의 한계를 느껴 현재와 같은 형식으로 서서히 변모를 추구하였다. 그의 풍경은 청명한 울트라 마린 (Ultra Marine)색채를 주조로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울트라 마린과 먹을 사용하여 다소 탁하면서도 몽롱한 분위기의 산수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가 울트라 마린을 선호하게 된 것은 차를 즐기면서 청화백자의 매력에 빠지면서 비롯되었다 한다. 그때부터 그는 마치 청화백자로 구운 도판(陶版)과 같은 느낌의 캔버스 작품을 선보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울트라 마린 색조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울트라 마린은 글자 그대로 ‘바다를 건너온’ 값비싼 재료로서 중국 청나라 시절엔 황제와 황족들만 이 색을 썼고 서양 중세기엔 성모 마리아의 옷을 채색할 때와 같이 특별한 경우에만 쓰였다 한다. 그에게 울트라 마린은 명상적이며 정신적인 색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풍경은 산수 외양의 재현이 아닌 명상과 정신세계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산수가 고유색을 버린 청색일변도인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것이 공평하게 드러난 달빛 아래에서의 산수를 표상하기 때문이라 한다. 고유색이 배제되었을 때 어떤 편견과 선입견도 사라지며 모든 것은 오직 푸른색 하나로 보여 진다는 것이다.
그의 산은 높고 강은 구비처 흐른다. 바다는 달빛을 받아 교교히 일렁이며 수평선 넘어 무한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는 달빛 아래 풍경에서 대기와 시간의 흐름을 포착한다. 산과 바다는 대기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이며 물은 달빛을, 꽃과 별은 하늘을 이야기하려는 형상들이다. 그의 산수에서 산은 유사한 형태로 반복되기도 하고 화면 중앙을 중심으로 상하좌우로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어 시점의 자유로움을 구사하기도 한다. 이 지점에 이르면 산수는 ‘사물화(事物化)된 풍경’ 즉 하나의 ‘산수 –기표(記表)’가 된다. 상하좌우로 대칭을 이루는 산들의 중심부는 마치 하나의 꽃망울이 터지듯 빅뱅의 순간처럼 밝은 빛으로 빛난다. 산은 우주로부터 폭발하며 꽃처럼 개화한다. 그에게 꽃은 하늘의 별의 은유이다. 그는 개화에서 우주의 생명현상을 포착하고자 한다.
“꽃이 폭발한다.
폭발하는 꽃은 천개의 산으로 흩어진다.
꽃은 풍경으로 확장하고 풍경은 꽃으로 되돌아온다.
나는 달빛과 바람을 그리고, 산을 바라보며 꽃을 생각한다.” (작가노트)
그는 마치 시인과도 같이 자신의 풍경을 폭발하는 꽃과 연관시킨다. 달빛과 바람과 꽃을 이야기하며 그는 자신의 작업을 존재의 본질과 변화에 대한 표현이라 말한다. 최근 그의 개인전에서는 ‘Flux’란 명제를 사용하였다. 플럭스는 ‘변화’,‘유동’, ‘흐름’으로 번역되는데, 존재는 공기나 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본질을 가지고 변화하는 속성을 가진다. 그의 산수가 대기의 흐름,바다, 폭발하는 꽃과 산을 소재로 하는 이유이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주와 환경 그리고 모든 생물과 무생물들은 존재라는 이름으로 흐름 속에서 생성되고
소멸합니다. 이것에 대한 회화적 표현이 나의 작업입니다.”(작가 노트)
필자는 과거 그의 작품을 자연대상과 심경이 하나가 되는 동양미학의 개념인 ‘의경(意境)’을 결부시켜 해석한 바 있다. 경(境)은 경계나 지경을 가리키는 단순한 의미에서부터 예술가의 예술수양이 도달한 정도나 수준을 가늠하는 조예(造詣)를 뜻한다. 바깥 사물을 마음으로 읽어 내는 경지는 본질에 대한 부단한 사유와 작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그는 존재의 본질을 생성과 소멸을 키워드로 하여 자신의 작품을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키고자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초미시의 미립자로부터 초거대의 우주를 넘나드는 하나의 창문인 셈이다. 실제로 그는 미립자의 존재로부터 빅뱅이나 급팽창의 우주론을 관통하는 양자역학(quantum physics)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태도이기도 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양자 역학은 원자와 이를 이루는 아원자 입자들 같은 미시 세계와 그러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탐구하는 현대물리학 분야이다. 양자역학은 주로 미시세계에 대한 연구이지만, 무한 우주의 거시 세계의 운행원리를 설명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쿼크(Quark)와 같은 초미립자 존재, 전자의 궤도이탈과 순간이동인 양자도약(quantum jump), 파동이면서 입자인 ‘파립자(wave–particle)’, 파동과 입자를 결정하는 것이 관찰의 순간이라는 점, 우주가 파동치는 입자의 강력한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등등 여전히 새로운 연구로 본질의 불명확성을 해소하려 하고 있지만 양자역학 역시 존재의 원리를 명확히 구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동양의 대표적 세계관인 음양오행설은 우주나 인간의 분리된 모든 현상이 음(陰)과 양(陽)의 쌍으로 나타나며 음(陰)과 양(陽)이 확장하고 수축함에 따라 우주의 운행이 결정된다고 한다. 음과 양이 네 가지 기운 (생, 노, 병, 사)에 따라 확장-수축함으로써 다섯 가지 오행이 나타난다는 것이 오행설이다. 오행설은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의 다섯 가지가 음양의 원리에 따라 행함으로써 우주의 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성리학에서는 우주를 그 구성요소인 이(理)와 기(氣)의 집산(集散), 생성과 소멸인 태극의 원리로 설명하기도 한다. 규명의 방법은 다르지만 동서양 모두 끊임없는 유동과 변화, 생성소멸의 문제로 우주의 본질과 원리를 규명하고자 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정태의 작업은 물론 이러한 자연과학적 이론들에 기반하여 이를 설명하거나 구현하려는데 목표를 두고 있지 않다. “양자역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Phillips Feynman)의 말처럼, 우주나 미립자에 대한 어떠한 이론도 명확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조형화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 그의 작업은 대상에서 경험한 숱한 자신의 감성을 통해 우주와 사물의 본성을 관조하며 직관하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는 서구의 현대미술이 합리적이며 분석적인 사유를 통해 추구해온 미술과 작품의 본질 규명 태도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는 이와는 다른 방식의 감성을 통해 우주와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회화의 본질을 추구했던 서구의 ‘모더니스트 페인팅’은 화면에서 모든 형상을 제거하고 오로지 물질적 속성으로서의 회화의 본질을 추구하며 미니멀리즘에 도달했다. 그러나 멸균처리된 것과 같은 물질적 평면은 회화의 본질도 예술의 본질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회화의 평면에 형상들은 되살아났고 이미지들은 폭증되었다. 텍스트로 이해되던 종래의 이미지와 형상들은 컨텍스트로 해석된다. 이정태의 회화는 서구 미술이 추구하던 본질 구현의 한계점에 대해 인식을 공유하지만 서구의 그것처럼 재현적 형상들의 회복이나 서로 무관한 이미지들의 중첩을 통해 다중적인 서사를 추구하려하지 않는다. 그의 화면에 표상된 산수의 형상들은 기호화된 풍경이며 유동과 변화로서의 우주와 사물의 본질에 대한 관념적 표상이다.
최근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특성중 하나는 시간의 흐름과 리듬을 연속된 곡선으로 처리하던 방식과 병행하여 무수한 점을 반복적으로 찍어 화면을 구축하는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전에도 그는 선과 숱한 점의 집적으로 구축된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최근 그의 화면에 보이는 숱한 점들은 꽃이기도 하고 하늘의 별이기도 하다. 꽃은 달빛 속에 핀 탱자나무 흰색 꽃을 표상한다. 그의 점들은 산수화의 준법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수직과 수평의 짧은 선들이 교차하며 점과 여백의 공간이 함께 공존하는 형태의 무수한 어긋남과 흔들림이 구현된다. 유동하는 곡선들과는 다른 변화하는 공간의 표출이다. 이 어긋남과 흔들림의 중첩은 ‘파립자’로서의 인식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밝은 원형의 화면 중앙은 우주의 탄생과 기원을 상징하는 빅뱅의 폭발이며 폭발을 통해 형성된 많은 원소와 입자들은 급격한 팽창과 응결을 통해 존재의 근원을 형성한다. 이들은 부단히 변화하고 팽창하며 새로운 공간과 존재를 열고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공간의 개화와 유동하는 시간의 흐름이 응축된 작지만 원대한 우주를 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사물과 우주와 인간의 본질적 질문을 펼쳐가는 차원 높은 의경(意境)의 세계를 향한 구도자적 노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