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G TAE LEE
청색 모노크롬 산수
이정태의 작품은 수 년 사이에 뚜렷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가 화폭에 물감을 쏟아 붓기 시작한지 몇 수 년, 그의 화혼은 서서히 하나의 불꽃을 지피기 시작했다. 변한다는 것, 그것이 그의 열정의 한 증거로서 드러났고, 보다 진실 된 자신의 회화적 주체성을 밝히는 도정이었다. 그의 첫 번째 화두는 ‘길’에서 출발했다. 3년 전의 개인전 주제였다. 그리고 ‘대화’, ‘흐름과 리듬’이란 주제로 개인전을 살려나갔다.
그의 미학적 길과 상관없이, 그의 조형적 길을 먼저 눈여겨본다면 그는 매우 단순한 기질의 소유자이다. 그의 생각과 미학은 복잡할지 몰라도 그의 조형적 성향은 일단 단순한 것을 지양한다. 단순하다는 것, 특히 그에 있어서 단순하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설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예술관과 관련된 기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질이 곧 예술의 형식을 낳는다는 낭만주의 시절의 한 정의를 떠나서라도,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일종의 즉흥성과 한산함의 미학을 설명하기 위해 관심이 쏠린다.
지난 수 년 간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의 그림은 점점 더 단순화 되고 있다. 우선 모든 그림에서 색깔들을 하나씩 제거시키고 있다. 색들은 배척당하고 형상들도 점차 사라진다. 몇 년 전 그의 풍경화들은 그 나름대로 현실과 비슷해 보였었다. 나무, 숲, 바위, 황토길, 구름, 물살... 이런 것들이 그럴듯하게 현실의 한 귀퉁이처럼 그려졌었다. 그것은 독특한 주제를 살리기 위해 여기저기서 발췌한 풍경화들 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꽤나 관념적인 풍경들이었으며, 색채는 거의 회갈색의 톤으로 일관된 단색조가 주를 이뤘었다. 그는 처음부터 색과 형상들에 대해서 그리 관대한 편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이미 그의 화풍이 지향하게 될 방향은 어느 정도 예고됐었고, 지금의 작품들에서 그 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그의 작품은 이전보다 훨씬 동양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이젠 그의 그림을 두고 풍경화란 말보다도 산수화란 말이 더 어울리게 되었다. 그의 그림이 전통적인 수묵 산수화의 기법과 직결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정서와 정신 혹은 그 미학과는 연결이 되고 있으며, 작품의 소재와 구도, 표현기법상의 시각적 분위기는 노골적으로 전통 산수화와 결합된다. 지금 그의 회화적 감각은 다분히 ‘그리기’ 쪽에 치우쳐 있다. 좀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선 긋기’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알다시피 ‘선 긋기’는 동․서를 막론하고 회화의 첫 걸음이고 회화의 기본원리이다. 그런데 그 단순한 원리는 단순하고 지당할수록 더욱 더 화가들의 미학적 문제로 남는다. 모든 회화는 아마 이 단순원리에서 출발하려 하거나 아니면 다시 되돌아오려고 하는 본성을 지닌 듯 하다. 회화에 대한 원점적인 질문을 하면서 새로운 조형미학을 모색하는 것, 그것은 회화의 긴 역사이기도 하다. 이정태도 이러한 거역할 수 없는 창작원리의 구조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을 창출하려는 것이다. 선과 리듬, 그리고 그것이 주는 생동감, 또 그 생동감이 있게끔 해준 내재적 힘의 원리들, 이와 관련된 정신적 의미와 지성적 측면, 관념적이며 시각적인 쾌감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의 작품에서 추구되는 문제들이다.
청색 모노크롬의 진동, 가장 추상적인 색으로 불리는 청색으로의 회귀, 검정색보다 명상적이고 시원한 색, 대기와 공기의 색으로 분류되는 청색 모노크롬이 펼치는 한 판의 파노라마에서 이정태의 회화적 승부는 결정된다. 선에는 흐름이 있고 굴곡과 악센트로 리듬을 살린다. 까칠하거나 매끄러운 선들이 여운을 남기고, 같은 방향의 선들이 수 없이 반복되고 엉키고 꺾기고 우회하고 부딪치고 밀리면서 기운 생동하는 물의 에너지를 표현한다. 이것은 선들의 놀림이 만들어 낸 장대한 힘이자, 자연의 한 신비이다. 그것은 또한 회화의 힘이기도 하다. 물론 그 신비한 매력은 궁극적으로 이정태의 독특한 예술적 기량에서 나온 것임에 의미가 있다.
그는 ‘대화’라는 주제를 오랫동안 이끌어 왔다. 필자는 처음에 그 명제와 그림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지난번 개인전에서 설명했듯이 바위와 물의 만남을 ‘대화와 교감’이라고 한 데서 필자가 생각해낼 수 있던 것이 바로 소리, 즉 자연의 소리였다.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와 물살이 바위에 부딪치거나 미끄러져가는 소리를 듣는 것이 바로 그의 그림들의 백미이다. 그 청각적 즐거움이 눈에 원하게 보이게끔 그려놓은 것이 우리를 신나고 유쾌한 상상을 하게 해 주는 힘이다. 변화무쌍하게 반복되는 자연의 소리와 물살들을 보면서 그 원리를 관조하고, 그것을 회화적 차원으로 은유한 것이 바로 청색 모노크롬 산수풍경으로 발전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걷고 있는 그의 회화적 도정은 갈수록 첩첩산경에 이르는듯하다. 수많은 선배 화가들이 그와 유사한 탐험들을 했으며, 조형적으로나 기법 적으로나 그와 유사한 단계에서 새로운 실험들을 계속하고 있는 현대작가들도 무수하다. 이제 그 중심에서 보다 더 깊은 자기만의 회화적 어법을 찾아가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윤익영/미술평론가)